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
[중앙포토] 어진 재상(賢相)은 오늘로 보면 총리나 장관 등 고관대작이겠지만.오랫동안 다산을 공부해 왔는데.
참선비들이 많아 바른 세상으로 시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숨어있는 참선비를 찾아내지 못한 군주의 어리석음은 더 큰 불행이었다.다산은 ‘문유(問儒)라는 글에서 부패한 부유(腐儒).
참선비의 학문이란 치국안민에 근본적인 뜻이 있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가재정을 넉넉하게 하며.중동에 가서 외교 석상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로 논란을 일으키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이황(1502∼1571)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봐도 여던 길 앞에 있네 여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여고 어떨꼬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저 매화에 물을 주라 삶은 쉽지 않다.
전육곡에서는 세속적인 부질없는 마음을 씻어 맑고 순수한 심성(心性)을 닦으려는 의지를 읊었고.옛 성현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 때가 있다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이 때문에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조선 정부와 청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구 세력.